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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6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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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의 전 국왕이자 칼 16세 구스타프의 할아버지. 1950년 10월 29일부터 1973년 9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구스타프 5세와 바덴의 빅토리아의 장남이며, 43년동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다. 평생동안 고고학을 좋아하였고 고대 이탈리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애칭은 거스티(Gusty).
2. 칭호[편집]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세습 왕자, 구스타프 아돌프 스코네 공작 전하 Hans Kunglig Höghet Gustaf Adolf, Sveriges och Norges Arvfurste, Hertig av Skåne(1882년 11월 11일 ~ 1905년 6월 7일)
- 스웨덴의 세습 왕자, 구스타프 아돌프 스코네 공작 전하 Hans Kunglig Höghet Gustaf Adolf, Sveriges Arvfurste, Hertig av Skåne(1905년 6월 7일 ~ 1907년 12월 8일)
-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전하 Hans Kunglig Höghet Gustaf Adolf, Sveriges Kronprins, Hertig av Skåne(1907년 12월 8일 ~ 1950년 10월 29일)
- 신의 은총으로 스웨덴인과 고트인, 벤트인의 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Hans Majestät Gustaf VI Adolf med Guds Nåde Sveriges, Götes och Vendes Konung(1950년 10월 29일 ~ 1973년 9월 15일)
3. 생애[편집]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당시 스웨덴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5세와 바덴의 빅토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구스타프 왕세자는 이틀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조용하고 온순한 아기였다.
파일:gustafadolfbaby.jpg
부모인 구스타프 5세와 바덴의 빅토리아의 결혼은 스웨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구스타프 5세는 당시 스웨덴을 통치하고 있던 베르나도테 왕조의 구성원이었고, 바덴의 빅토리아는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증손녀로 과거 스웨덴을 통치했던 홀슈타인-고트로프 왕조[1] 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 홀슈타인-고트로프 왕조와 베르나도테 왕조의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구스타프는 베르나도테 왕조의 정통성을 더욱 높여주는 존재였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웁살라 대학교에서 역사, 경제, 정치, 고고학을 공부하였다.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를 읽을 줄 알았으며 라틴어를 이해했다.
1907년 12월 8일, 할아버지 오스카르 2세가 사망하였다. 그 결과 오스카르 2세의 장남 구스타프 5세가 즉위하였다.
구스타프 5세가 스웨덴을 43년(정확히는 42년 10개월 21일) 간 통치하면서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왕세자로 남아있었다.
1950년 10월 29일 구스타프 5세가 별세하면서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위 당시 67세였고[2] 스포츠와 고고학 같은 당시 스웨덴이 관심쓰지 않는 학문에 열중해 있기 때문에 인기가 별로였다.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출혈성 위궤양으로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1973년 9월 15일 20시 35분 만 90세로 사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페렴이었다. 왕위는 장손인 칼 16세 구스타프가 물려받았다. 여담으로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사망한 다음날(1973년 9월 16일)은 스웨덴 총선 선거일이었다. 밑에 가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장수집안이다. 할아버지 오스카르 2세가 78세로 장수해서 아버지 구스타프 5세가 49세에 즉위할 정도였고, 본인도 67세에 늦은 나이에 즉위했으니 말 다했다. 솔나 왕실묘지[3] 에 두 아내와 함께 묻혔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 친할아버지: 오스카르 2세(1829년 ~ 1907년)
- 아버지: 구스타프 5세(1858년 ~ 1950년)
5. 여담[편집]
- 1926년, 아직 황태자 구스타프 공작이었던 시절에 국빈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일제는 마침 그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취향을 파악하고 경주의 서봉총 발굴작업 참가를 권했고 이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고분 이름 서봉총의 '서(瑞)'는 스웨덴을 뜻하며, 당시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에 금강산에 올랐다는 설도 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주를 기억해서 6.25 전쟁 때 스웨덴이 의료지원단을 대한민국에 파견해 부산에 야전병원을 건설했을 때, 간호사에게 자기가 머물렀었던 경주 교동 최부자 고택의 안채 등 경주의 풍경을 카메라로 찍어오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영친왕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고려자기를 소장하고 있었으며, 신라의 문화가 한국에서 제일이라고 극찬한 뒤 고려자기를 가리키며 "이런 예술은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려자기의 담백한 맛은 동양을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양 하면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만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코리아에는 특수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문화를 만드는 정신적 힘은 영원불멸합니다. 창조적 힘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어 영친왕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 마거릿과의 결혼 초에 사생아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었을 정도로 오페라 배우와 스캔들이 있었다.
- 재위 기간 중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이 열렸다.
- 어머니 빅토리아의 최애는 동생 빌헬름으로 구스타프 아돌프에게는 평생 정을 전혀 안 줬다.
- 코코넛 볼과 콩포트를 매우 좋아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1] 표트르 3세부터 시작하는 러시아 제국의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가 직계고 스웨덴계가 방계다.[2] 그의 이 기록은 찰스가 깨버렸다. 찰스 왕세자가 1948년 11월 14일 생이니 2016년 11월 1일 이후로 즉위한다면 정말 구스타프 6세의 기록을 뛰어넘게 되는데, 결국 그 것이 실제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시대에는 시대가 보수적이라서 구스타프 5세가 구스타프 6세 아돌프에게 양위하지 않은 것이지만, 반세기 더 늦게 태어난 찰스의 경우에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마침내(?) 2022년 9월 8일에 찰스 왕세자는 찰스 3세로 즉위했다.[3] 원래 스웨덴 국왕은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름 교회에 안장되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이래 계속 왕들이 안장되다 보니 공간이 없어서 구스타브 6세부터는 스톡홀름 외곽의 하가 공원에 있는 솔나 왕실묘지에 묻히기로 결정되었다.[4] 칼 16세 구스타프 등[5] 마르그레테 2세, 베네딕테 공주, 그리스인의 왕비 아나마리아 [6] 여섯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192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귀 수술에 의한 감염이었으나, 당시 영국에서는 그녀가 스웨덴 왕실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7] 비록 자녀는 없었지만 말년까지 같이 호위를 대동하지 않은 산책을 다니는 등 사이는 좋았다. 사실 사산된 공주가 하나 있는데, 공주를 사산한 이후로 루이즈는 불임이 되었다고 한다.[8]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와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차녀. 루이 마운트배튼 경의 누나이자 필립 공의 이모이기도 하다.[9] 공교롭게도 의붓자녀들과 6촌관계다.[10] 어머니인 바덴의 빅토리아가 파벨 1세의 셋째 딸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증손녀였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마리야 여대공의 할아버지이자 로마노프 가문의 중시조인 표트르 3세는 한때 스웨덴 국왕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